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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안의에서 열린 전국아나키스트대표자회의.
안의 광풍루, 농월정"함양산청 안의거창" 도매금으로 불리는 서부 경남 고장은 같은 경남인 밀양 사람에게도 '삼수갑산'에 버금가는 오지를 일컫는 관용구였다. 포로수용소를 나온 아버지가 어떤 연유로 그 외진 안의 땅에 자리 잡게 되었을까?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아나키스트' 인연 때문이었다는 것이 공식적인 답이다. 당시 작성된 아나키스트들의 내부 문건과 경찰 당국의 사찰보고서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1946년 4월 26~28일 안의에서 전국 아나키스트 대회가 열리고 그 결과 릴게임몰 로 독립노농당이 창당되었다. 당수에 선출된 단주(旦洲) 유림(1894-1961)은 중경임시정부 국무위원 출신이다. 해방 전후 아나키스트 운동에 중요한 계보를 인도한 분이다. 아버지도 독립노농당 당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안의 정착에 다른 사연도 살필 만하다. 청운 안문(安門)에서는 세 청년이 포로수용소 생활을 했다. 내 아버지에 앞 검증완료릴게임 서 삼종형(X환), 그리고 그 형의 고종인 양동 고모의 아들인 '불란서형' 이형동씨다. 삼종형은 서울공대 재학 중에 의용군에 징집되어 총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한 채 전선에 투입되었다. 즉시 체포되어 부산을 거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보내졌다. 그는 오래지 않아 석방되었다. 그리고 석방되자마자 안의고등학교의 수학선생으로 근무했다. 이데올로기와는 담을 쌓고 릴게임바다이야기사이트 지낸 공학도였던 그가 안의에 온 사연은 그야말로 우연 그 자체였다.
고등학생인 그의 동생 O환이 먼저 인민의용군에 징집되었다. 등교 명령에 따라 출석했다가 그대로 끌려간 것이다. 키는 훤칠하게 컸지만 불과 16세 어린애였다. 그는 전라도 전선에 투입되었고 이내 인민군 패잔병으로 강제 북행길에 끌려들었다. 그런데 일행을 이끌던 중년 사내가 황금성릴게임 슬그머니 도망칠 기회를 주었다. 소년은 하산하여 함양경찰서에 자수했다. 함양경찰서장 박모 씨는 공교롭게도 밀양 출신이었다. 소년이 확실한 우익 부호의 자제임을 알고는 증서를 만들어 귀향 조치시킨다. 재종 숙부는 아들을 살려준 서장에게 큰 사례금을 건넸다.
그리고선 불과 몇 달 만에 박 서장에게 새 일거리가 생겼다. 이 릴게임야마토 번에는 소년의 형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힌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는 석방 브로커로 활동한 셈이다. 어쨌든 그 경찰의 연줄로 초기에 석방된 삼종형은 몇 달 후에 안의고등학교 수학 선생이 됐다. 본명인 '안X환' 대신 '박XX'이란 가명을 사용했다. 서장의 친척으로 가장하여 도민증을 발급받았던 것이다. 안의고등학교 1회 졸업생 중 '수학천재 박XX선생'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 갓 석방된 아버지가 정처가 마땅치 않자, 안의에 자리잡은 삼종형이 주선하여 자리를 얻은 것이라고 했다. 이 학교에서 아버지는 역사, 영어, 그리고 에스페란토를 가르쳤다고 한다.
함양군 안의면 소재지. 다리 오른쪽에 광풍루가 있다.백성현 기자
아버지가 안의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접고 서울로 되돌아온 것은 1952년 늦가을 아니면 초겨울이었을 것이다. 서울을 비운 것은 도합 2년 반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백 년이 걸려도 못다 이야기할 사연들이 쌓였을 것이다. 어찌 우리 가족만의 일이랴. "전쟁은 하루를 일 년으로 만든다." 한 베트남 작가의 글귀다.
아버지는 가족을 안의로 불렀다. 우리 집 네 식구가 안의에서 함께 산 것은 불과 몇 달이었을 것이다. 여름이 끼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농월정 물노리'라는 비뚤비뚤 가로글씨가 새겨진, 파리똥이 덕지덕지 내려앉은 작은 사진을 본 기억이 있다. 이 시기 동안 아버지는 대구를 자주 왕래했다고 한다. 대구에는 친인척, 친지가 많았다. 일제 강점기에 내 삼촌들은 모두 대구에서 학교를 다녔다. 아버지도 수창보통학교를 졸업했으니 대구에는 근거와 인맥이 든든했다. 안의가 고향인 경북대학교 철학과 하기락 선생(1912-1997)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하 선생은 최초의 '아나키스트 학자'로 알려져 있다. 대구를 거점으로 한 아버지의 아나키스트 활동에 대해서 유창훈, 김용관 두 분의 상세한 증언을 들었다. 단주 유림기념사업회 김영천 회장의 주선에 의한 것이다. 두 분은 당시 20대 초반의 학생으로 단주 선생을 지근에서 보좌한 청년들이었다. 단주 선생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를 소개하면서 "본시 우리 쪽 동지였는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잠시 인민군에 몸담게 되었어. 그러나 안심하고 따르시게나." 아버지가 결코 마르크시스트가 아니라는 보증이었다. 단주 선생은 해방 직후 서울에서 아버지의 추종을 받았다고 한다. 신혼 시절에 아버지는 존경하는 분이라며 아내를 인사시키려 창신동의 허름한 처소를 방문했다. 멋진 콧수염을 기른 중년 노인이 한겨울인데도 불도 때지 않는 냉방에 의연하게 앉아서 인사를 받더라고 어머니는 회상했다. 귀한 꿀 한 병을 들고 갔으나 차를 끓일 불이 없어서 그냥 두고 나왔다고 했다.
다섯 살이었으니 안의 시절의 내 기억은 매우 단편적이고도 흐릿하다. 그중 한 장면만은 비교적 선명하다. 잿더미에서 연기가 모락거리는 목조 건물의 잔해를 본 기억이 남아있다. 안의고등학교 교사에 불이 난 것이다. 지역민들 사이의 갈등이 빚어낸 방화였다고들 했다. 지리산 인근이라 인민군 치하에서 잔혹한 일이 많았고, 지역사회는 심한 후유증을 앓았을 것이다.
1953년 무렵의 아버지.
아버지와 이병주 선생2006년 함양문화원에서 펴낸 「간추린 향토사」는 해방 이후의 역사를 통째로 생략했다. "국토분단, 사상적 대립, 여순반란, 빨치산의 준동, 6.25사변 등 혼란 상태로 기로에 있었다. 따라서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해방 이후의 향토사는 생략하기로 한다."
방화 사건이 일어날 당시 아직 지리산 빨치산이 완전하게 토벌되기 전이었고 인척 관계나 인정 때문에라도 그들의 보급 투쟁에 내통한 주민들이 있었을 것이다. 화재 사건의 진상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 불신이 팽배한 상황에서 진상조사도 힘들고, 설사 진상을 밝힌다고 하더라도 수습은 더욱 쉽지 않았을 터이니 그냥 덮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또 하나 기억의 편린은 어른들이 큰 기와집에서 왁자지껄하던 장면이다. 영어 교사로 재직하던 정병조 선생이 동료들을 모두 초청했던 것이다. 후일 지곡면의 일두 정여창고택을 들릴 때마다 내가 어릴 때 보았던 바로 그 집이라는 확신을 다지게 되었다.
안의 방화사건은 20세기 말에도 재현되었다. 화림동 계곡의 명소 농월정(弄月亭)이 원인 모를 불로 전소되어 찾는 이들의 마음을 쓰리게 했다. 다행스럽게 오래지 않아 산뜻하게 재건되었다. 연전에 함양에서 열린 행사 끝에 관계자들과 달빛 교교한 한밤중에 농월정 바위에 퍼지고 앉아 막걸리를 나눈 적이 있다. 이를테면 월인주(月印酒)라고나 할까.
해방 직후에 설립된 안의중학교와 안의고등학교는 같은 아나키스트들이 세운 학교이지만 재단은 별도다. 이념적 동지 사이에도 주도권 다툼이 있었던 것 같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느 고을에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불화와 반목의 전형적인 원인 중 하나는 과거의 신분이다. 갑오경장으로 반상(班常)의 구분이 무너졌고 일제시대에 들어서는 일본의 지배를 받는 같은 '피지배자'라는 일종의 자조적 평등 의식이 확산되기도 했다. 일본이 제공하는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계층이 현실적 힘을 누리게 되었다. 과거 중인계층은 상업을 통한 재력의 축적이 돋보였고 신교육의 기회에 적극 동참하면서 진취적 사상의 수용자가 되었을 것이다. 내 고향 밀양에서도 독립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중인계층 출신의 선각자들이었다.
안의를 상징하는 건물은 광풍루(光風樓)다. 안의 사람들이 금호강이라 부르는 큰 개천을 내려보며 선 2층 누각은 안의 사람의 자랑이다. 현판은 영조 시대에 5년이나(1535-1538) 안의 현감으로 재직한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는 유홍준 교수의 감정이 있었다. 조영석은 양반 출신으로는 드물게 그림에도 능했다고 한다. 제월광풍(霽月光風), 비 개인 후의 달과 바람, 수려한 경치를 찬상하는 글이다. 광풍루는 내 어린 시절에도 결혼식과 주민의 회합 장소로 사용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이 시기 동안 하동의 이병주 선생이 안의에 와서 아버지 일행을 만났다는 증언이 있다. 한 번은 나보다 한 살 위인 아들 권기를 데리고 왔고 농월정에서 함께 사진도 찍었다고 한다, 아버지도 나림 선생도 돌아가신 뒤에 들은 이야기다. 그러나 이권기 교수나 나는 전혀 기억이 없다. 어쨌든 당시 지리산 자락의 지식청년들이 서로 내왕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안경환 명예교수(서울대 로스쿨)·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안의 광풍루, 농월정"함양산청 안의거창" 도매금으로 불리는 서부 경남 고장은 같은 경남인 밀양 사람에게도 '삼수갑산'에 버금가는 오지를 일컫는 관용구였다. 포로수용소를 나온 아버지가 어떤 연유로 그 외진 안의 땅에 자리 잡게 되었을까?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아나키스트' 인연 때문이었다는 것이 공식적인 답이다. 당시 작성된 아나키스트들의 내부 문건과 경찰 당국의 사찰보고서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1946년 4월 26~28일 안의에서 전국 아나키스트 대회가 열리고 그 결과 릴게임몰 로 독립노농당이 창당되었다. 당수에 선출된 단주(旦洲) 유림(1894-1961)은 중경임시정부 국무위원 출신이다. 해방 전후 아나키스트 운동에 중요한 계보를 인도한 분이다. 아버지도 독립노농당 당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안의 정착에 다른 사연도 살필 만하다. 청운 안문(安門)에서는 세 청년이 포로수용소 생활을 했다. 내 아버지에 앞 검증완료릴게임 서 삼종형(X환), 그리고 그 형의 고종인 양동 고모의 아들인 '불란서형' 이형동씨다. 삼종형은 서울공대 재학 중에 의용군에 징집되어 총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한 채 전선에 투입되었다. 즉시 체포되어 부산을 거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보내졌다. 그는 오래지 않아 석방되었다. 그리고 석방되자마자 안의고등학교의 수학선생으로 근무했다. 이데올로기와는 담을 쌓고 릴게임바다이야기사이트 지낸 공학도였던 그가 안의에 온 사연은 그야말로 우연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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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무렵의 아버지.
아버지와 이병주 선생2006년 함양문화원에서 펴낸 「간추린 향토사」는 해방 이후의 역사를 통째로 생략했다. "국토분단, 사상적 대립, 여순반란, 빨치산의 준동, 6.25사변 등 혼란 상태로 기로에 있었다. 따라서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해방 이후의 향토사는 생략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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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기억의 편린은 어른들이 큰 기와집에서 왁자지껄하던 장면이다. 영어 교사로 재직하던 정병조 선생이 동료들을 모두 초청했던 것이다. 후일 지곡면의 일두 정여창고택을 들릴 때마다 내가 어릴 때 보았던 바로 그 집이라는 확신을 다지게 되었다.
안의 방화사건은 20세기 말에도 재현되었다. 화림동 계곡의 명소 농월정(弄月亭)이 원인 모를 불로 전소되어 찾는 이들의 마음을 쓰리게 했다. 다행스럽게 오래지 않아 산뜻하게 재건되었다. 연전에 함양에서 열린 행사 끝에 관계자들과 달빛 교교한 한밤중에 농월정 바위에 퍼지고 앉아 막걸리를 나눈 적이 있다. 이를테면 월인주(月印酒)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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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환 명예교수(서울대 로스쿨)·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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