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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 기자]
영친왕(1897~1970)의 부인이자 고종황제의 며느리인 이방자를 한국인들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시킨 두 개의 계기가 있었다. 1916년과 1963년의 일이 그 계기가 됐다.
대한제국 멸망 6년 뒤인 1916년,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여왕(梨本宮方子女王) 또는 나시모토 마사코(梨本方子)로 불리던 그가 이왕세자(李王世子)인 이은과 약혼한 사실이 발표됐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그해 8월 3일 자 기사에 "리왕세자비(李王世子妃)난 리본궁 방자녀왕으로 결뎡"됐다고 보도했다. 이왕세자비(세자빈)는 그렇게 결정해졌다는 이 발표는 그를 한국인들에게 널리 야마토게임예시 알린 첫 번째 사건이다.
남편이 될 이은은 고종이 황제이고 순종이 황태자였을 때 영친왕(영왕)으로 불렸다. 1907년에 고종이 일제의 강압으로 물러나고 순종이 황제가 된 뒤에는 순종의 이복동생인 그가 황태자로 격상됐다.
그러나 실제로는 격상이라 할 수 없었다. 그해 12월 5일, 그는 인질이 되어 일본에 끌려갔다. 이토 릴게임신천지 히로부미의 손에 이끌려 한국을 떠난 그는 1910년 대한제국 멸망과 함께 아버지가 이태왕(이태왕)으로 격하되고 이복형이 이왕으로 내려감에 따라 이왕세자라는 지위를 갖게 됐다.
원치 않은 정략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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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자의 젊은 시절 모습.
ⓒ 위키미디어 공용
릴게임5만 이방자는 1901년 11월 4일 당시 일왕인 무쓰히토(연호 메이지)의 사촌형제의 손녀로 태어났다. 이런 신분을 갖고 태어난 그는 자신이 대한제국에서 끌려온 인질과 약혼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가 약혼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일이 다 정해진 뒤였다. 그에게 소식을 알려준 것은 부모도 아니고 지인들도 아니 릴게임바다이야기사이트 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스마트폰을 무심코 집어 들었다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되는 식이었다. 그의 구술을 기초로 작성된 회고록인 <나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 이 마사코입니다>에 이런 대목이 있다.
"우리 집은 매년 여름이면 오이소에 있는 별장에서 여름을 나곤 했다. 오이소는 도쿄 서남쪽에 있는 해안 도시로 유명한 별장지대였다. 1916년 8월 3일 아침, 별장에서 무심히 신문을 집어든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왕세자 전하의 사진과 나란히 있는 것은 틀림없는 나의 사진이었다. 이 왕세자 전하와 내가 약혼했다는 주먹만한 활자가 내 이마를 쳤다."
이방자 자신에게도 통지되지 않은 이 정략결혼은 한일우호의 상징으로 선전됐다. 자신이 일반적인 외국 왕자도 아니고 비운의 외국 인질과 약혼했다는 사실을 신문에서 읽고 충격을 받은 딸을 보면서 그의 어머니도 가슴이 아팠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다독였다고 한다.
"여러 번 사퇴의 말씀을 드렸으나 선(鮮)·일 유대를 굳건히 하고 일반 백성에게도 교훈이 된다는 폐하의 뜻이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너도 괴롭겠지만."
이렇게 한반도에 알려진 이방자는 예순세 살 때도 강렬한 인상을 주면서 한국인들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이때는 의식이 희미해진 남편과 함께 일본항공(JAL) 전세기를 타고 영구 귀국한 일로 인해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63년 11월 23일 자 <조선일보>는 전날 오후의 김포공항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공항에 마중나온 수많은 종친들, 신하임을 자처하고 각 지방에서 올라온 할아버지들 그리고 인근 주민들은 비행기가 미 공군 비행장에 내린 통에 달음질을 해야 하는 소동이 벌어져 더러는 태극기를 든 채 쓰러져 신음했고, 경비하는 미군에게 밀려 쓰러진 한 노인은 '가실 때도 일본 배, 오실 때도 일본 비행기 그리고 내려도 꼭 미국 비행장에 내릴 게 뭐냐'고 호통을 쳤다."
이날 영친왕은 파자마 차림으로 병상에 누운 채로 비행기에서 내렸다. 의식이 희미했으니 귀국의 감동을 느끼기도 힘들었다. 위 기사의 부제목 중 하나는 '비극의 황태자 돌아오던 날'이다. 47년 전에 약혼 소식으로 한일 양국에 충격을 줬던 이방자는 이때는 병상에 누운 전직 황태자와 함께 귀국한 일로 인해 또 한 번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한일우호라는 명분은 이 부부의 약혼뿐 아니라 영구 귀국과도 관련이 있다. 이들이 입국한 1963년 11월이라는 시점은 박정희 정부와 이케다 하야토 내각(1960~1964)이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한국 여론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지를 함께 고심하던 때였다.
민간정부의 대통령이 되자마자 한일협정을 밀어붙일 것으로 예상되던 박정희는 제5대 대선(1963.10.15.) 한 달 뒤에 이 부부의 귀국을 성사시켰다.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영친왕의 평소 열망이 이 귀국의 근본 동력이지만, 해방 이후 18년간 막혔던 귀국이 성사된 데는 한일우호를 표방해야 했던 양국 정권의 이해관계도 함께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처럼 이방자라는 존재가 한국인들에게 각인된 데는 정치적 배경이 작용했지만, 그 자신은 한국인들을 순수한 사랑으로 대하고자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은 그의 헌신적인 봉사 활동에서 확인된다. 62세 나이로 한국에 정착한 그는 향년 104세로 작고할 때까지 이 활동을 일관되게 이어갔다. 한두 해도 아니고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그렇게 살았다면, 그의 사랑이 순수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사회봉사에 헌신한 이방자
▲ 경기도 안산시 사동 장애인 재활시설 명휘원 내 이방자 여사 기념관을 찾은 한 제자가 이방자 여사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2007.10.12.
ⓒ 연합뉴스
그는 1916년에는 일본 왕족의 이미지로 한국인들에 각인되고, 1963년에는 비운의 대한제국 황실의 일원으로 한국인들에게 각인됐다. 그랬던 그가 한국 귀국 뒤에는 복지활동가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한국인들에게 다가갔다. '황태자비 이방자'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자선사업가 이방자'가 기억되는 것은 그가 그 일을 그만큼 열심히 수행한 결과다.
이전부터 산코가이(찬행회)라는 자선단체를 운영했던 이방자는 한국 귀국 뒤에 이를 자행회(慈行會)로 개칭하고 한국자행회와 일본자행회를 각각 운영했다. 오타베 유지 시즈오카복지대학 교수가 쓴 이방자 평전인 <낙선재의 마지막 여인>에 따르면, 일본자행회는 해마다 100만 엔 정도의 기금을 이방자에게 보냈다. 일본자행회 기금의 일부가 이방자의 한국 활동에 사용됐던 것이다.
이방자는 1966년부터는 신체적으로 불편한 아동들과 함께 목공·재봉·편물 등을 공부했다. "처음에 모은 학생은 15명으로 농아, 소아마비, 지팡이를 이용하는 정도의 장애인도 있었다"라고 평전은 알려준다.
그의 활동은 계속 확장됐다. 1967년에는 영친왕의 아호가 들어간 명휘원이라는 복지시설을 출범시켰다. 이곳도 그가 아이들과 함께하는 공간이 됐다. 평전은 "빵을 굽거나 찌는 등 이방자도 자주 함께 일했다. 그것을 아이들과 함께 앉아 같이 먹었다"라는 증언을 소개한다.
그는 정신적 불편함을 가진 아동들과도 함께했다. 평전은 "1972년 10월 정신지체아를 위한 교육기관인 자혜학교를 설립했다"라고 한 뒤 아이들의 지적 능력 계발에 신경을 썼다고 알려준다. "아무리 IQ가 낮아도 그 아이만의 능력이 있을 겁니다"라며 그가 열정을 불태웠다고 한다.
이런 활동에 소요되는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이방자는 공예작품을 만들고 창덕궁 낙선재 일부를 개방했다. 또 해외에 나가 궁중 의상쇼를 열었다. 그 자신이 일본을 돌아다니며 작품도 팔고 후원금을 받기도 했다.
일본 왕족 출신인 그가 옛 식민지 땅에서 벌이는 이런 활동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시각도 있었지만, 그는 소신을 갖고 이 활동에 인생을 걸었다. 이 때문에 아들 이구가 서운한 말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위 평전의 한 대목이다.
"아들 구마저도 말다툼할 때 무심코 '어머니는 거지입니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고 한다. 구걸을 하면서 자신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이방자는 일제의 정치적 목적에 희생돼 한국 황태자의 배우자가 됐지만, 이 결혼을 계기로 그 자신도 한국 황족들의 비애를 공유하며 일생을 살게 됐다. 그런 뒤에는 한국 장애인들과 고락을 공유하며 인생의 나머지 절반을 보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이 소명을 수행했다. 1989년에 향년 88세로 창덕궁 낙선재에서 눈을 감았다.
영친왕(1897~1970)의 부인이자 고종황제의 며느리인 이방자를 한국인들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시킨 두 개의 계기가 있었다. 1916년과 1963년의 일이 그 계기가 됐다.
대한제국 멸망 6년 뒤인 1916년,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여왕(梨本宮方子女王) 또는 나시모토 마사코(梨本方子)로 불리던 그가 이왕세자(李王世子)인 이은과 약혼한 사실이 발표됐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그해 8월 3일 자 기사에 "리왕세자비(李王世子妃)난 리본궁 방자녀왕으로 결뎡"됐다고 보도했다. 이왕세자비(세자빈)는 그렇게 결정해졌다는 이 발표는 그를 한국인들에게 널리 야마토게임예시 알린 첫 번째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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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제로는 격상이라 할 수 없었다. 그해 12월 5일, 그는 인질이 되어 일본에 끌려갔다. 이토 릴게임신천지 히로부미의 손에 이끌려 한국을 떠난 그는 1910년 대한제국 멸망과 함께 아버지가 이태왕(이태왕)으로 격하되고 이복형이 이왕으로 내려감에 따라 이왕세자라는 지위를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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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매년 여름이면 오이소에 있는 별장에서 여름을 나곤 했다. 오이소는 도쿄 서남쪽에 있는 해안 도시로 유명한 별장지대였다. 1916년 8월 3일 아침, 별장에서 무심히 신문을 집어든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왕세자 전하의 사진과 나란히 있는 것은 틀림없는 나의 사진이었다. 이 왕세자 전하와 내가 약혼했다는 주먹만한 활자가 내 이마를 쳤다."
이방자 자신에게도 통지되지 않은 이 정략결혼은 한일우호의 상징으로 선전됐다. 자신이 일반적인 외국 왕자도 아니고 비운의 외국 인질과 약혼했다는 사실을 신문에서 읽고 충격을 받은 딸을 보면서 그의 어머니도 가슴이 아팠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다독였다고 한다.
"여러 번 사퇴의 말씀을 드렸으나 선(鮮)·일 유대를 굳건히 하고 일반 백성에게도 교훈이 된다는 폐하의 뜻이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너도 괴롭겠지만."
이렇게 한반도에 알려진 이방자는 예순세 살 때도 강렬한 인상을 주면서 한국인들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이때는 의식이 희미해진 남편과 함께 일본항공(JAL) 전세기를 타고 영구 귀국한 일로 인해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63년 11월 23일 자 <조선일보>는 전날 오후의 김포공항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공항에 마중나온 수많은 종친들, 신하임을 자처하고 각 지방에서 올라온 할아버지들 그리고 인근 주민들은 비행기가 미 공군 비행장에 내린 통에 달음질을 해야 하는 소동이 벌어져 더러는 태극기를 든 채 쓰러져 신음했고, 경비하는 미군에게 밀려 쓰러진 한 노인은 '가실 때도 일본 배, 오실 때도 일본 비행기 그리고 내려도 꼭 미국 비행장에 내릴 게 뭐냐'고 호통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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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이방자라는 존재가 한국인들에게 각인된 데는 정치적 배경이 작용했지만, 그 자신은 한국인들을 순수한 사랑으로 대하고자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은 그의 헌신적인 봉사 활동에서 확인된다. 62세 나이로 한국에 정착한 그는 향년 104세로 작고할 때까지 이 활동을 일관되게 이어갔다. 한두 해도 아니고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그렇게 살았다면, 그의 사랑이 순수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사회봉사에 헌신한 이방자
▲ 경기도 안산시 사동 장애인 재활시설 명휘원 내 이방자 여사 기념관을 찾은 한 제자가 이방자 여사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2007.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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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16년에는 일본 왕족의 이미지로 한국인들에 각인되고, 1963년에는 비운의 대한제국 황실의 일원으로 한국인들에게 각인됐다. 그랬던 그가 한국 귀국 뒤에는 복지활동가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한국인들에게 다가갔다. '황태자비 이방자'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자선사업가 이방자'가 기억되는 것은 그가 그 일을 그만큼 열심히 수행한 결과다.
이전부터 산코가이(찬행회)라는 자선단체를 운영했던 이방자는 한국 귀국 뒤에 이를 자행회(慈行會)로 개칭하고 한국자행회와 일본자행회를 각각 운영했다. 오타베 유지 시즈오카복지대학 교수가 쓴 이방자 평전인 <낙선재의 마지막 여인>에 따르면, 일본자행회는 해마다 100만 엔 정도의 기금을 이방자에게 보냈다. 일본자행회 기금의 일부가 이방자의 한국 활동에 사용됐던 것이다.
이방자는 1966년부터는 신체적으로 불편한 아동들과 함께 목공·재봉·편물 등을 공부했다. "처음에 모은 학생은 15명으로 농아, 소아마비, 지팡이를 이용하는 정도의 장애인도 있었다"라고 평전은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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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자는 일제의 정치적 목적에 희생돼 한국 황태자의 배우자가 됐지만, 이 결혼을 계기로 그 자신도 한국 황족들의 비애를 공유하며 일생을 살게 됐다. 그런 뒤에는 한국 장애인들과 고락을 공유하며 인생의 나머지 절반을 보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이 소명을 수행했다. 1989년에 향년 88세로 창덕궁 낙선재에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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