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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로 표지판
광주에 '지호로'가 있다. 빛을 그린 화가로 유명한, 우리나라의 자연과 기후에 맞는 빛과 색채를 통해 한국적 인상주의를 완성시킨 오지호 화백의 이름을 딴 도로명이다. 지호로는 옛 동명동 7~2번지에서 시작해서 산수동 5~2번지에 끝나는, 필문대로에서 무등산 관광호텔 방향으로 가는 복개도로인데, 길이는 약 2.3㎞다.
지호로의 주인공 오지호(吳之湖, 1905~1982)는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상실한 해인 1905년 전라남도 동복군 읍내면 독상리, 현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에서 보성군수 등을 지낸 부친 오재영과 수원김씨 오징어릴게임 사이의 8남매 중 막내인 넷째아들로 태어난다. 본명은 점수(占壽), 본관은 동복(同福), 아호는 모후산인(母后山人)이다. 그가 아호로 삼은 모후산인의 '모후산'은 그가 태어난 고향 뒷산이다.
#오점수에서 오지호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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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호 화백 . 오지호 회고전 도록(1988년)
어린 시절 그는 서당에 입학 한학을 공부항 후 1913년 동복보통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동복보통학교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 1920년, 전주고등보통학교(전주고보)에 진학하였다가, 이듬해인 1921년 서울의 휘문고등보 바다이야기고래출현 통학교(휘문고보) 2학년에 편입한다. 그가 전주고보를 그만두고 휘문고보로 편입한 것은, 휘문고보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髙羲東, 1886~1965)이 미술 교사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휘문고보 시절 그는 고희동으로부터 회화의 기본을 배웠고, 평생 동지이자 절친이 된 김주경(金周經, 1902~1981)을 만난다.
오지호는 휘문고보 릴박스 3학년이던 1922년, 광주의 대지주였던 지응현의 딸 지양진(沚良珍)과 결혼, 슬하에 승우·승윤 등 두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화가가 된다. 오지호의 네 손자도 조각가와 화가가 되었으니, 오지호에서 시작된 화풍이 손자까지 이어지면서 남도 최고의 서양화가 집안이 된다.
휘문고보를 졸업한 다음 해인 1925년, 본격적인 화가 수업을 위해 도쿄 릴게임무료 에 건너간 후 가와바타 미술학교(川端畵學校)를 거쳐, 1926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양화과(洋畫科, 서양학과)에 입학하고, 1931년 졸업한다. 그가 유학 중 깊이 빠졌던 미술 사조는 당시 일본 화단을 지배하던 인상주의(印象主義, impressionism)였다. 인상주의 또는 인상파는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거부하고 색채·색조·질감 자체에 관심을 두는 미술 사조를 말한다. 인상주의를 추구한 화가들을 인상파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고, 색채나 색조의 순간적 효과를 이용하여 눈에 보이는 세계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하려 하였다.
오지호는 1931년 졸업 후 귀국, 녹향회에 참여한다. 녹향회는 1928년 12월 김주경 등의 주도로 서양화 중심의 작가들이 모인 단체였다.
고향인 화순 동복에 잠시 머문다, 1933년 서울에 올라와 처음 잡은 직장이 동아백화점 광고부였다. 1년 만에 그만두고 친구 김주경의 추천으로 자리를 옮긴 곳이 송도고등보통학교(송도고보) 미술 교사였다. 원래 개성 송도고보는 김주경이 재직하던 학교였는데, 김주경이 경성고등보통학교(경성고보)로 자리를 옮기면서, 오지호에게 그 자리로 제안한 것이었다.
오지호는 개성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오점수(吳占壽)라는 이름 대신 '오지호(吳之湖)라는 필명을 쓴다. 그리고 개성에서 마음껏 자연의 풍광을 화폭에 담는다. 방학 때 친구 김주경과 만주를 여행하기도 했고, 1938년에는 김주경과 공동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컬러 화집인 '김주경·오지호 2인 화집'을 펴내기도 했다. 훗날 오지호는 개성에서의 9년을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그의 대표작 '남향집'은 이때(1939년) 그려진다. 그가 그린 '남향집'은 송악산 기슭에 자리잡은 초가집인데, 친구 김주경이 살았던 집이었고, 이를 오지호가 물려받은 집이었다.
오지호의 대표작품, 남향집
일제는 만주사변(1931), 중·일 전쟁(1937), 그리고 태평양전쟁(1941)을 일으키며 미친 듯이 날뛴다. 1942년, 오지호는 창씨개명은 물론,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전쟁기록화를 제작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총독부가 권장하는 전쟁기록화 제작에는 참여하지 않겠다. 억지로 그림을 그리라고 강요한다면 차라리 붓을 꺾겠다"며 조선총독부의 요구를 거부한다. 그가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낙인찍혀 일제의 감시를 받게 된 연유다. 그는 일제가 마지막 횡포를 부리며 압박을 가해오자 함경도 단천으로 피신하였고, 1945년 3월 고향인 화순 동복으로 낙향한 후 해방을 맞는다.
#조선대학교 교수가 되다
손자 상욱이 조각한 오지호 기적비
오지호는 해방 직후 전국 문화인 모임인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가 건설되자 산하단체인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서양화 중앙위원으로 참여, 덕수궁 근정전에서 '해방기념미술전람회'를 개최하였는데, 친일 작가는 제외되었다. 그는 이론적 선두 주자로서 자주적 민주주의 국가건설과 함께 진보적 미술계를 만들려는 실천에 앞장선다.
미군정에 이어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자, 1948년 낙향하여 광주에 둥지를 튼다. 1949년, 조선대학교에 미술과가 창설되자 교수가 되었고, 그리고 6·25동란을 맞는다.
6·25 동란은 오지호에게 큰 시련이었다. 고향 동복에서 '농민위원회 위원'을 지내다, 백아산에 입산하여 이른바 '남부군(南部軍)'인 전남지구총사령부에서 출판부원으로 활동하다 검거되었기 때문이다. 남부군 시절 그는 선전물 제작에 주로 참여했다고 한다. 1952년 검거된 그는 곧바로 석방되었고, 그리고 조선대학교 교수직에 복직하게 된다. 석방 뒤 복직과 함께 지금의 광주 지산동 초가집에 정착하는데, 이해가 1953년이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지자, 오지호는 '자유'에 환호한다. 그 자유스러운 민주주의 사회 아래서 마음껏 빛과 색, 나아가 '자유로운 대지 아래의 원시'를 그리고자 했고, 그런 그림을 그릴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에 이어 들어선 장면 정권에 실망하였고, 그래서 민족·자주·통일을 주장하던 '전남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결성대회에 참여한다. 그러나 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는 민자통을 용공 친북 단체로 몰았고, 오지호는 5·16쿠데타 바로 다음 날 검거되어 7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항소(抗訴)심에서 무죄를 선고받는다. 감옥살이로 몸과 마음이 약해진 그는 3년간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1980년 5·18민주항쟁 당시 그는 유럽 여행 중이었다. 귀국 후 제자들에게 '그때 너희들은 무엇을 했느냐'며 질책했다고 한다. 그리고 1982년 12월, 그는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한다. 당년 78세였다. 그의 사후에, 그를 기리는 회고전이 국립현대미술관(1985년)과 남봉미술관(1988년)에 개최된다. 대표작으로는 '누드'(1928), '시골소녀'(1929), '자화상'(1931), '아내의 상'(1937), '사과밭'(1937), '남향집'(1939), '추광(秋光)'(1960), '항구'(1980) 등이 있다. 그중 '남향집'은 2013년 국가등록문화재 제536호로 등록된다.
오지호는 제8회 대한민국 문화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았고(1973),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1976), 제22회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수상한다(1977). 그리고 그의 사후인 2002년에는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된다.
오지호는 자연의 내부에서 발산되는 강력한 생명력까지 화면에 담은 작품을 그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였다. 또한,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역사적 격동기를 살아가면서 예술가의 지조를 지키고 올곧게 행동한 지식인이기도 했다.
오지호가 살았던 지산동 초가
모후산인 오지호가 조선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54년부터 1982년 타계할 때까지 살았던 초가집은 지금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가 태어난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에는 그의 생가도, 그를 기리는 오지호 기념관도 건립되어 있다.
오지호 기념관(화순군 동복면)
오지호 화백 탄생 100주년을 기념, 1905년 무등산자락 문빈정사 입구에 그의 손자인 상욱이 조각한 오지호 기적비도 건립된다. 그리고 무등산 자락 원효사에는 그가 그린 아미타 후불탱화도 남아 있다. 오늘 그를 기억하고 기리는 흔적들이다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
광주에 '지호로'가 있다. 빛을 그린 화가로 유명한, 우리나라의 자연과 기후에 맞는 빛과 색채를 통해 한국적 인상주의를 완성시킨 오지호 화백의 이름을 딴 도로명이다. 지호로는 옛 동명동 7~2번지에서 시작해서 산수동 5~2번지에 끝나는, 필문대로에서 무등산 관광호텔 방향으로 가는 복개도로인데, 길이는 약 2.3㎞다.
지호로의 주인공 오지호(吳之湖, 1905~1982)는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상실한 해인 1905년 전라남도 동복군 읍내면 독상리, 현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에서 보성군수 등을 지낸 부친 오재영과 수원김씨 오징어릴게임 사이의 8남매 중 막내인 넷째아들로 태어난다. 본명은 점수(占壽), 본관은 동복(同福), 아호는 모후산인(母后山人)이다. 그가 아호로 삼은 모후산인의 '모후산'은 그가 태어난 고향 뒷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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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호 화백 . 오지호 회고전 도록(1988년)
어린 시절 그는 서당에 입학 한학을 공부항 후 1913년 동복보통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동복보통학교 시절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 1920년, 전주고등보통학교(전주고보)에 진학하였다가, 이듬해인 1921년 서울의 휘문고등보 바다이야기고래출현 통학교(휘문고보) 2학년에 편입한다. 그가 전주고보를 그만두고 휘문고보로 편입한 것은, 휘문고보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髙羲東, 1886~1965)이 미술 교사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휘문고보 시절 그는 고희동으로부터 회화의 기본을 배웠고, 평생 동지이자 절친이 된 김주경(金周經, 1902~1981)을 만난다.
오지호는 휘문고보 릴박스 3학년이던 1922년, 광주의 대지주였던 지응현의 딸 지양진(沚良珍)과 결혼, 슬하에 승우·승윤 등 두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화가가 된다. 오지호의 네 손자도 조각가와 화가가 되었으니, 오지호에서 시작된 화풍이 손자까지 이어지면서 남도 최고의 서양화가 집안이 된다.
휘문고보를 졸업한 다음 해인 1925년, 본격적인 화가 수업을 위해 도쿄 릴게임무료 에 건너간 후 가와바타 미술학교(川端畵學校)를 거쳐, 1926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양화과(洋畫科, 서양학과)에 입학하고, 1931년 졸업한다. 그가 유학 중 깊이 빠졌던 미술 사조는 당시 일본 화단을 지배하던 인상주의(印象主義, impressionism)였다. 인상주의 또는 인상파는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거부하고 색채·색조·질감 자체에 관심을 두는 미술 사조를 말한다. 인상주의를 추구한 화가들을 인상파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고, 색채나 색조의 순간적 효과를 이용하여 눈에 보이는 세계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하려 하였다.
오지호는 1931년 졸업 후 귀국, 녹향회에 참여한다. 녹향회는 1928년 12월 김주경 등의 주도로 서양화 중심의 작가들이 모인 단체였다.
고향인 화순 동복에 잠시 머문다, 1933년 서울에 올라와 처음 잡은 직장이 동아백화점 광고부였다. 1년 만에 그만두고 친구 김주경의 추천으로 자리를 옮긴 곳이 송도고등보통학교(송도고보) 미술 교사였다. 원래 개성 송도고보는 김주경이 재직하던 학교였는데, 김주경이 경성고등보통학교(경성고보)로 자리를 옮기면서, 오지호에게 그 자리로 제안한 것이었다.
오지호는 개성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오점수(吳占壽)라는 이름 대신 '오지호(吳之湖)라는 필명을 쓴다. 그리고 개성에서 마음껏 자연의 풍광을 화폭에 담는다. 방학 때 친구 김주경과 만주를 여행하기도 했고, 1938년에는 김주경과 공동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컬러 화집인 '김주경·오지호 2인 화집'을 펴내기도 했다. 훗날 오지호는 개성에서의 9년을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그의 대표작 '남향집'은 이때(1939년) 그려진다. 그가 그린 '남향집'은 송악산 기슭에 자리잡은 초가집인데, 친구 김주경이 살았던 집이었고, 이를 오지호가 물려받은 집이었다.
오지호의 대표작품, 남향집
일제는 만주사변(1931), 중·일 전쟁(1937), 그리고 태평양전쟁(1941)을 일으키며 미친 듯이 날뛴다. 1942년, 오지호는 창씨개명은 물론,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전쟁기록화를 제작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총독부가 권장하는 전쟁기록화 제작에는 참여하지 않겠다. 억지로 그림을 그리라고 강요한다면 차라리 붓을 꺾겠다"며 조선총독부의 요구를 거부한다. 그가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낙인찍혀 일제의 감시를 받게 된 연유다. 그는 일제가 마지막 횡포를 부리며 압박을 가해오자 함경도 단천으로 피신하였고, 1945년 3월 고향인 화순 동복으로 낙향한 후 해방을 맞는다.
#조선대학교 교수가 되다
손자 상욱이 조각한 오지호 기적비
오지호는 해방 직후 전국 문화인 모임인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가 건설되자 산하단체인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서양화 중앙위원으로 참여, 덕수궁 근정전에서 '해방기념미술전람회'를 개최하였는데, 친일 작가는 제외되었다. 그는 이론적 선두 주자로서 자주적 민주주의 국가건설과 함께 진보적 미술계를 만들려는 실천에 앞장선다.
미군정에 이어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자, 1948년 낙향하여 광주에 둥지를 튼다. 1949년, 조선대학교에 미술과가 창설되자 교수가 되었고, 그리고 6·25동란을 맞는다.
6·25 동란은 오지호에게 큰 시련이었다. 고향 동복에서 '농민위원회 위원'을 지내다, 백아산에 입산하여 이른바 '남부군(南部軍)'인 전남지구총사령부에서 출판부원으로 활동하다 검거되었기 때문이다. 남부군 시절 그는 선전물 제작에 주로 참여했다고 한다. 1952년 검거된 그는 곧바로 석방되었고, 그리고 조선대학교 교수직에 복직하게 된다. 석방 뒤 복직과 함께 지금의 광주 지산동 초가집에 정착하는데, 이해가 1953년이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지자, 오지호는 '자유'에 환호한다. 그 자유스러운 민주주의 사회 아래서 마음껏 빛과 색, 나아가 '자유로운 대지 아래의 원시'를 그리고자 했고, 그런 그림을 그릴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에 이어 들어선 장면 정권에 실망하였고, 그래서 민족·자주·통일을 주장하던 '전남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결성대회에 참여한다. 그러나 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는 민자통을 용공 친북 단체로 몰았고, 오지호는 5·16쿠데타 바로 다음 날 검거되어 7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항소(抗訴)심에서 무죄를 선고받는다. 감옥살이로 몸과 마음이 약해진 그는 3년간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1980년 5·18민주항쟁 당시 그는 유럽 여행 중이었다. 귀국 후 제자들에게 '그때 너희들은 무엇을 했느냐'며 질책했다고 한다. 그리고 1982년 12월, 그는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한다. 당년 78세였다. 그의 사후에, 그를 기리는 회고전이 국립현대미술관(1985년)과 남봉미술관(1988년)에 개최된다. 대표작으로는 '누드'(1928), '시골소녀'(1929), '자화상'(1931), '아내의 상'(1937), '사과밭'(1937), '남향집'(1939), '추광(秋光)'(1960), '항구'(1980) 등이 있다. 그중 '남향집'은 2013년 국가등록문화재 제536호로 등록된다.
오지호는 제8회 대한민국 문화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았고(1973),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1976), 제22회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수상한다(1977). 그리고 그의 사후인 2002년에는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된다.
오지호는 자연의 내부에서 발산되는 강력한 생명력까지 화면에 담은 작품을 그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였다. 또한,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역사적 격동기를 살아가면서 예술가의 지조를 지키고 올곧게 행동한 지식인이기도 했다.
오지호가 살았던 지산동 초가
모후산인 오지호가 조선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54년부터 1982년 타계할 때까지 살았던 초가집은 지금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가 태어난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에는 그의 생가도, 그를 기리는 오지호 기념관도 건립되어 있다.
오지호 기념관(화순군 동복면)
오지호 화백 탄생 100주년을 기념, 1905년 무등산자락 문빈정사 입구에 그의 손자인 상욱이 조각한 오지호 기적비도 건립된다. 그리고 무등산 자락 원효사에는 그가 그린 아미타 후불탱화도 남아 있다. 오늘 그를 기억하고 기리는 흔적들이다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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